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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홍은 「주홍글씨」에 들어오기 전의 일을 좀처럼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그녀에게 그 암울한 시절은 돌아볼 가치조차 없는 과거일 뿐이다.
모든 시작은 암암리에 자행된 어리석은 실험이었다.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능력을 만들어내는 「용기」로 이용되었다. 실험을 주도한 자와 탐욕에 눈이 먼 권력자들에게 그녀는 기적에 이르기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다.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감금, 훼손, 신체 개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고문을 매일 견뎌야 했다.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서 수없이 사투를 벌였고, 그때마다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뒤에 기다리고 있던 건 또 다른 고통의 굴레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의 장난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의 이능력은 폭주했고, 추악한 비밀이 숨겨진 지하감옥은 핏빛 폐허로 변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폐허 속에 버려진 이능력자 소녀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어느 우아한 상류층 자선가였다. 그리고 한 송이 들꽃을 옮겨 심듯 그녀를 자신의 정원으로 데려왔다. 자선가에게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피로 얼룩진 땅에서 피어나 수없이 짓밟히고도 살아남은 이 들꽃의 질긴 생명력이었다. 이 소녀는 마치 자신을 위해 피어난 꽃 같았다.
그렇게 「붉은 접시꽃」은 「주홍글씨」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렸다. 이난나는 가장 충직한 수양딸이자, 가장 날카로운 칼날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이난나는 알지 못했다. 이 딸은 다른 꽃들처럼 쉽게 길들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잔홍은 자신의 이능력을 숨긴 채, 어둠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기묘한 눈으로 새로운 가족들을 몰래 관찰했다. 그녀를 괴롭히려 하거나, 비위를 맞추려 하거나, 심지어 그저 호기심을 보였을 뿐인 또래들조차 그녀와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서서히 잠식되었다. 피해자들은 어느새 현실과 환상을 분간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이내 그 의심마저 서서히 사라졌다. 결국, 그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엔 저마다의 불꽃이 있지.」
잔홍의 눈에 사람들의 얼굴은 지루한 잿빛이었지만 영혼 속의 불꽃은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마다 불꽃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활활 타오르고, 어떤 것은 조용히 아른거렸으며, 어떤 것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어떤 것은 피처럼 붉었다… 그녀의 눈에는 대부분은 지루했다. 가끔 봐줄 만한 영혼도 있었지만, 결국 잠깐의 심심풀이일 뿐이었다. 불꽃들이 붕괴의 기로에서 모조리 타버린 뒤 절망의 잿더미를 피워 올릴 때야, 그녀는 비로소 오랫동안 공들인 걸작을 바라보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따분한 불꽃으로 가득한 이 차갑고 단조로운 세계에도 언제나 특별한 영혼 하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순수한 흰색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 불꽃은 지금껏 본 적 없는 낯선 색으로 변했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울까… 언제나 나를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색이야.」
눈부신 핏빛
미지의 존재 앞에서 인간은 으레 비슷한 호기심과 오만함을 보인다. 경외는 두려움으로, 탐색은 방종으로 변해가고, 마침내 「정복」이라는 불씨가 탐욕에 불을 붙인다… 「이능력」을 대하는 일부 사람들의 태도도 그러했다.
교단, 학회, 사설 연구소, 비밀결사… 탐욕과 광기의 노예가 된 사람은 피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떤 대가도 마다하지 않고, 제약도 금기도 모두 무시한 채, 이능력이 가져다주는 기적을 갈망했다… 혹은, 이능력 자체를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어느 한 작은 섬에는 「탁목조」라는 비밀결사가 있었다. 그들은 이능력은 신비한 존재가 내린 은총이고, 특별한 눈동자를 가진 선택받은 아이만이 그 은총을 누릴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을 신봉했다. 그래서 그들은 곳곳에서 적격자를 모아 이능력을 각성시키기 위한 「용기」로 삼고, 지하감옥에 가둔 채 매일 독한 비약을 눈에 들이부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이능력을 끌어낼 수 있으며, 그 눈을 자신에게 이식하면 그 힘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
잔홍의 기억은 그 부조리하고 잔혹한 지옥에서 시작되었다.
보석같이 아름다운 소녀의 눈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눈에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소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색각 이상인 그녀의 눈에는 희뿌연 색으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탐욕과 무지의 종용 아래 인간이 자행하는 죄악의 심연이었다. 「탁목조」가 눈을 노리고 그녀를 납치한 뒤, 그녀의 일상은 끔찍한 실험의 연속이었다. 매일 손발이 묶이고 눈꺼풀이 강제로 벌어진 채, 뜨겁고 코를 찌르는 탁한 액체가 눈에 떨어지는 모습을 떨면서 지켜봐야 했다. 뒤이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사람들의 사악한 기도를 들어야 했다.
탐욕에 눈먼 자들은 하루가 멀다고 자신의 터무니없는 가설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잔홍은 이 비인간적인 고문 속에서 정말로 눈에 깃든 이능력을 각성하고 말았다. 그녀가 안구를 적출하는 의식 현장에 끌려갔을 때 결사원들은 그 눈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기 시작했고, 숨겨왔던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권력자, 거상, 명망 높은 가문… 주변의 소음은 점차 흐릿해졌다. 잔홍은 마취로 몽롱해진 의식 속에서 처음으로 흑백이 아닌 색을 보았다. 따뜻하고 눈부신 그 색은 영혼의 불꽃에서 터져 나왔고, 치열한 사투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와, 이윽고 그녀를 둘러싼 선홍색 늪이 되었다…
그날, 「혹란의 눈」이 만들어 낸 환상은 섬을 집어삼켰다. 서로를 의심하며 다투던 흉악범들은 환상 속에서 서로를 죽였고, 끝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거미와 꽃
잔홍은 피 웅덩이 속에서 섬뜩하게 아름다운 붉은색을 보았다.
붉은빛의 주인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텅 빈 지하 감옥에 하이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소리가 멈추고, 비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의 영혼을 보듬어 주려는 듯했다.
「어디 좀 보자꾸나, 내 가엾은 꽃송이.」
「오늘부터 주홍글씨가 바로 네 집이란다.」
집…이 뭐지?
눈앞의 여인은 소녀에게 「집」을 약속했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소녀는 그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여인의 말과 손길이 그 누구보다 다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도 좋아.」
잔홍은 경계하며 눈앞의 늘씬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온화한 눈빛 속에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한 탐욕스러운 웃음을 감추고 있었다. 그 영혼의 불꽃은 옷차림처럼 핏빛으로 화려하게 타올랐다. 탐욕의 불길은 잔홍의 눈앞에서 일렁이며, 금방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한마디를 불렀다:
「어머니.」
꽃을 찾아서
주홍글씨 정원은 많은 꽃을 기르고 있었다. 자애로운 이난나는 그녀들을 정성껏 돌보며 단비를 내리고 가지를 정리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마음에 든 꽃은 새 이름을 부여받았는데, 「붉은 접시꽃」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잔홍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꽃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정원 중심에 있는 기분을 즐길 뿐이었다.
주홍글씨 저택에서 이난나는 더 이상 본성을 숨기지 않았다. 너그럽고 따뜻한 자선가는 대외적으로 꾸며낸 모습에 불과했다. 그녀의 내면에는 상인 특유의 냉정함과 탐욕, 그리고 상류층에 발을 들인 후 나날이 커져가는 오만함뿐이었다. 그녀는 마치 우뚝 솟은 핏빛 거탑처럼 정원에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난나는 언제나 딸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했는데, 유독 잔홍은 가장 혹독한 훈련과 체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지하 감옥에서 겪은 일들로 이미 고통에 무뎌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진 훈련을 받고 나서도 그녀는 어머니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보여주며, 이난나가 지시한 모든 임무를 완수했다. 한편 어머니가 다른 자매들의 운명을 농락할 때, 잔홍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자신도 정원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으리란 것을.
「혹란의 눈」은 감정을 꿰뚫어 볼 뿐만 아니라, 그 맛까지 알 수 있었다. 공포의 비릿한 단맛, 절망의 쓰라림, 증오의 알싸함까지… 자매들의 감정은 잔홍의 양분이 되었다. 잔홍은 어머니의 즐거움을 이해했다.
그녀의 기묘한 눈은 늘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영혼을 찾아 헤맸다. 마치 꽃을 감상하고, 마음에 드는 꽃을 꺾어 모으듯이. 밤이 되면 저택에는 듣기 좋은 흐느낌 소리가 울려 퍼졌고, 영혼의 불꽃은 불안한 듯 일렁거렸다. 잔홍은 그런 곳이라면 기꺼이 찾아가 연약한 꽃을 위로했다. 그리고는 그 꽃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가 버렸다. 마음이 흔들린 여동생들은 그녀의 말과 시선에서 구원받았다.그러나 이러한 즐거움도 오래가지 않았다. 소녀들의 정신은 「혹란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피폐해졌고, 잔홍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폐인으로 전락했다. 영혼의 색도 점차 빛을 잃어 시들어 가는 꽃처럼 메말라갔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주홍글씨」의 정원은 넓었고, 꽃이 시들더라도 다른 꽃이 있으니까.
언니, 언니
잔홍은 자매들 중 오직 그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칠 때만 이능력을 억제했다.
그리고 오직 그 한 사람만이 그녀가 여태껏 보지 못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순수하고 맑게 빛나는 창백한 불꽃이었다. 마치 동이 틀 무렵의 맑고 하얀빛 같았다. 잔홍은 아름다운 광경에 매료된 듯 처음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말했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울까…」
다포딜이라는 흰옷을 입은 소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양어머니의 명령을 받아 차 문 앞으로 가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여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에 온 걸 환영해.」
잔홍은 손을 내밀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집착과 호기심이 눈에 서렸다. 소녀의 얼굴에는 일그러진 미소가 번졌다. 잔홍은 빼앗기라도 하듯 그 손을 홱 움켜쥐고 언니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금방이라도 그 새하얀 불꽃 속으로 몸을 던질 기세였다…
다소 뜻밖의 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은 명령에 따라 파트너이자 자매이자 가족이 되었다.
잔홍은 자신과 언니가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서로 정반대인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주홍글씨」의 정원에 얼기설기 얽혀있는 덩굴은 그들을 죽을 때까지 하나로 묶어놓을 것이다. 그들은 함께 같은 진창에 빠질 것이고, 같은 침대를 공유하고, 같은 전장을 누빌 것이며, 결국 같이 땅에 묻힐 것이다. 둘은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이었다.
잔홍은 매일 그 특별한 눈으로 다포딜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이난나에게 거둬진 딸로서 다포딜은 바위처럼 굳건하고 무감각했다. 아무리 가혹한 임무일지라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했다. 목표를 제거할 때는 기계처럼 냉정했다… 그런 언니도 임무나 체벌이 끝나면 잔홍의 상처를 다정하게 치료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주면서도 좀처럼 말은 하지 않았다.
… 그러나 얼마 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니가 달라졌다. 일을 처리할 때의 단호함과 냉정함은 미간을 찌푸린 채 망설이는 모습으로 변했고, 매일 밤 속삭이듯 털어놓는 우울과 불안이 더욱 깊어졌다. 이때부터 희고 안정적이었던 불꽃이 이따금 흔들리고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홍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음, 언니에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
잔홍은 막 피어나는 꽃을 관찰하듯 계속 다포딜을 지켜보았다. 언니가 나약해졌다면 어머니가 언니를 망가뜨리고 버리기 전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수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 잔홍은 아쉬워하며 그날만을 기다렸다.
토끼 한 마리
「… 후원 구석에 토끼가 있어.」
「채소잎을 줬더니 다 먹었어. 물지도 않고…」
웃음을 띤 채 다포딜의 말을 듣고 있던 잔홍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잔홍은 토끼가 귀엽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붉은 두 눈을 가진 회색 실험동물일 뿐인데. 고작 토끼 한 마리가 뭐라고 언니는 저런… 무방비한 표정을 짓는걸까.
하지만 이후 몇 달 동안 후원에서 체벌받을 때면 다포딜은 몰래 토끼를 보러 갔고, 잔홍은 그런 그녀를 지켜보았다. 고통 속에서도 언니의 눈빛은 다정했다. 잔홍은 가끔 생각했다. 저런 다정한 눈빛은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는 것을.
어느 날, 다포딜은 익숙한 구석에서 토끼의 사체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말없이 지내다가, 밤이 되기도 전에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잔홍이 한참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잠겨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언니의 공허한 눈빛은 바닥을 향해 있었고, 영혼은 바람 속에서 힘겹게 타오르는 불씨처럼 기댈 곳 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잔홍의 눈은 쓰라린 고통을 느꼈다. 잔홍은 처음으로 언니에게서 이렇게 뚜렷하게 동요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우울함에 빠진 언니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잔홍은 언니가 순간 망설이는 걸 느꼈다. 뒤이어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경계를 풀고 잔홍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서로의 온도가 맞닿은 순간 잔홍은 속으로 만족감에 겨운 감탄을 내뱉었다. 심지어 그 토끼가 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아마도 언니는 그 죽은 토끼를 떠올릴 때마다 내가 한 짓이라고 의심하고 있겠지.」
언니의 배반 후, 한동안 잔홍은 밤마다 그 죽은 토끼를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언니는 묻지 않을 것이고 잔홍도 굳이 말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언니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잔홍은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과 언니의 이야기는 결국 둘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손에 죽는 결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죽음이 될지 모르는 그 순간에, 이 이야기로 작별을 건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언니, 난 정말 그 토끼를 죽이지 않았어.」
위험한 시선
잔홍과 다포딜은 「주홍글씨」의 가장 예리한 칼날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저지른 죄악의 깊이는 마음속의 공허만큼 깊었다.
거듭되는 시련과 임무를 거쳐, 그들은 어머니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며 어머니의 가장 믿음직한 두 자루의 칼이 되었다. 칼이 되더라도 잔홍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그저 틈이 날 때마다 다포딜을 바라볼 뿐이었다.
잔홍은 어머니가 쥐고 있는 한 자루의 칼로서 제거해야 하는 장애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서 그녀가 잘 아는 건 다포딜뿐이었다.
다포딜은 임무가 끝나면 거울을 보며 생각에 잠긴 채 상처를 감았다. 지치고 우울하고 상처투성이여도 여전히 아름다운 언니의 뒷모습을, 잔홍은 말없이 감상했다. 그러곤 늘 자신의 이능력과 다정한 포옹으로 언니의 불안을 없애주었다.
결국 이 불안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
어느 임무에서 다포딜은 마땅히 칼을 휘둘러야 할 순간에도, 목숨을 구걸하는 목표를 앞에 두고 망설였다. 잔홍은 언니의 떨리는 손과 목숨을 구걸하는 자가 숨긴 살의를 보았다. 잔홍의 머릿속에 문득 위험한 생각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눈앞의 상대가 언니를 암기로 급습하자, 잔홍은 일부러 언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예상했던 공격을 받아내며 만족스러운 듯 그 교활한 적을 처리했다…
급소를 비껴간 상처에서 피가 왈칵 나왔지만 이 정도 고통은 감수할 수 있었다. 잔홍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어 실수한 언니를 바라보았다. 다포딜은 덜덜 떨면서 칼을 놓았다. 뒤이어 다급한 발소리와 떨리면서 사과하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언니도 저들처럼 나약해졌네.」
잔홍은 눈앞에서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흔들리는 백색의 불꽃을 지켜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전에도 여러 번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자신의 이능력을 억제하지 않고, 그 눈으로 언니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들여다본 뒤 둘만의 환상 속에 가두는 모습을. 그리고 언니의 경계를 허물고, 취향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고, 기억까지 조종하는 것. 언니가 감정에 휘둘리는 시시한 인간으로 전락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장난감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잔홍은 그러지 않았다.
비록 전보다 한층 누그러지고 흔들리기 시작했어도, 이 백색의 불꽃은 여전히 그녀를 매료시켰다. 이제는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완벽한 사냥감을 앞에 두고 총을 쏘지 않는 사냥꾼처럼 그 완전한 모습을 남겨 두고 싶었다.
처음 마주한 색
잔홍은 언제부터 언니가 변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자신이 얼마나 언니를 믿었는지, 얼마나 방심했고 어리석었는지도 잊지 않았다.
그건 이난나의 경매장에서 일어났다. 현장을 지키던 다포딜이 규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잠깐 모습을 감췄다가 초췌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왼쪽 눈을 부여잡고, 「사고」였다는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언니가 얼굴을 다쳤다는 소식에 잔홍은 크게 화를 냈고, 그 뒤 이어진 임무에서 화풀이하듯 행동이 한껏 거칠어졌다. 그 후 몇 달 동안 다포딜은 안대를 쓰고 다녔다. 언니를 위로하기 위해 잔홍도 아무 쓸모 없는 안대를 맞췄다. 자랑하듯 안대를 꺼내 보였을 때 언니는 얼떨떨해하면서 웃어 보였다.
하지만 잔홍은 그 안대 아래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비가 내리던 밤, 잔홍은 피가 흥건한 바닥 위에 쓰러진 이난나와, 안대를 벗어 던진 채 손에 칼을 쥔 이능력자 다포딜을 보았다. 어머니의 피는 언니의 옷자락을 눈이 따가울 만큼 강렬한 선홍빛으로 물들였다. 그 불꽃… 그 순수한 백색의 불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과거와 다른, 그 누구와도 다른, 잔홍이 처음 마주한… 「고결한 색」이었다.
잔홍은 눈앞의 혼란을 이해해 보려 했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그녀는 언니가 왜 배신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언니의 이능력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그 낯선 불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포딜은… 그저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두려움과 죄책감에 혼란스러워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흉기를 움켜쥔 손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언니는 아무 말 없이 도망갔다. 그 빛나는 불꽃은 주홍글씨의 정원을 에워싼 울타리 너머로 사라졌다.
잔홍은 언니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도, 피 웅덩이에 쓰러진 생사불명의 어머니도 잊었다. 모든 생각과 시선이 언니가 떠난 방향만을 향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언니에게 수없이 말했지만 이번만큼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은 한마디였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울까…」
운명적인 재회
어머니는 죽지 않았다. 깨어난 뒤 상처를 회복한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잔홍은 놀라지 않았다. 언니의 암살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어머니 같은 사람이 아무런 대비도 해두지 않았을 리 없다. 어머니는 여전히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선가였다. 언행으로도 다포딜의 배신과 도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잔홍의 눈에는 그 미묘한 변화가 보였다.
과거 어머니의 감정은 늘 평온하고 냉담했으며 심지어 오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암살사건을 겪은 뒤론 의심, 초조, 그리고 상실에 대한 불안을 달고 살았다… 그 속물스러운 모습은 시시하고 뻔한 임무 목표와 다를 바 없었다.
기억 속에 있던 핏빛의 거탑은 이미 무너졌지만, 잔홍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녀의 유일한 욕망은 제 손아귀를 벗어난 언니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새로운 「동생」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녀는 이제 곁에 두어도 안심할 수 있는 나약한 아이들을 유독 아끼기 시작했고, 파세트라도 그중 한 명이었다. 처음에 잔홍은 그녀를 새로 들여온 꽃 한송이로 여기고 적당히 가지고 놀다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동생에겐 의외로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조숙하면서도 능글맞은 그녀는 사람의 환심을 사는 외모와 연기력을 갖추고 있었고, 어머니의 편애와 모진 괴롭힘에도 심성을 잃지 않았다… 물을 주며 기르는 꽃보다는 질긴 잡초 같았다. 게다가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 주홍글씨에서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기를 간파한 잔홍은 흥미가 동했다. 먼저 어머니에게 그녀를 발탁해 이름을 지어주자고 말을 꺼냈고, 그때부터 둘은 이난나의 곁을 지키는 최측근이 되었다. 눈치 빠른 동생은 잔홍의 시선을 눈치챘지만, 얌전히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나름의 흥밋거리는 찾았지만, 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후, 잔홍은 다포딜만큼 특별한 영혼을 지닌 사람은 만나지 못했고, 언니를 향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마침내 길고 긴 조사 끝에 그녀는 언니의 행방을 찾아냈다. 헤테로의 낡은 골동품 가게, 그곳은 마치 언니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화분 같았다.
이난나의 다음 목표는 헤테로에 있었다. 잔홍은 흔쾌히 임무를 받아들이고 정찰에 나섰다. 그녀는 매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해 에이본 앞을 몇 번이고 오갔다. 마침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 얼굴을 발견했다.
잔홍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가슴에 손을 얹자, 심장이 파도처럼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 곁에서 도망칠 생각하지 마, 언니.」